재와 환상의 그림갈

Review 2015. 3. 15. 09:14



 최근 일본 라이트노벨에서도 게임 및 이세계 진입 판타지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 판타지 소설 쪽에서 많이 쓰인 소재이다 보니 싫증을 내는 독자들도 많지만 저는 판타지 쪽 소설들은 거의 읽어 본 적이 없어 오히려 신선한 편이네요. 또 일본 특유의 RPG 시스템이 반영된 세계관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재와 환상의 그림갈'은 게임, 이세계 진입, 그리고 던전 판타지라는 소재를 버무려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하루히로와 일행들은 기억을 잃은 채 '게임 같은 세계' 그림갈에 던져져 살아남기 위해 몬스터들과 싸웁니다. 작중 서술 등을 통해 배경이 게임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이라는 걸 짐작할 수는 있으나 그게 이야기 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야기 전개가 게임 판타지보다는 정통 판타지 혹은 이세계 진입물의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살아남기 위해 의용병이 된 하루히로와 일행들이 낯선 세계에서 싸워 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재와 환상의 그림갈은 JRPG 세계관을 훌륭하게 소설의 형태로 재현해 냈습니다. 게임 같은 세계인 그림갈에는 게임에서나 등장할 법한 소재들이 세계관 전체에 배치되어 있으나 그게 크게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우선 현실적이지 않은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아요. 몬스터나 캐릭터들의 HP나 MP가 직접적으로 명시되는 일도 없고 레벨이나 스탯 같이 강함을 수치화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몬스터를 잡아 골드 및 아이템을 얻는 과정조차 개연성 있게 묘사되고, 직업은 직업 길드에 가입해 스승으로부터 기술을 전도 받는 식으로 표현했어요. '게임이니까'라고 간단히 변명할 수 있는 설정들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맞춘 거죠. 덕분에 게임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읽을 수가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이 세계가 사실 게임인지 아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건 독자로 하여금 전개 및 극적인 상황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주인공 일행의 성장을 처음부터 그렸다는 점입니다. '소드 아트 온라인'과 같은 작품에서 주인공인 키리토는 작중 최강의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작품에서 화려한 액션 및 시원한 전개를 보여 주기 위해 강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캐릭터가 성장해 나가는 걸 표현하기는 어렵게 되죠. 하루히로 일행은 단순히 말해 최약의 전투 능력을 가진 의용군이었습니다. 돈이 없어 변변한 장비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기술도 경험도 없기 때문에 약한 몬스터인 고블린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도 사투를 벌여야만 하죠. 그렇게 싸워 가면서 캐릭터 간의 연계가 늘고 요령도 생기며 점점 강해지는 캐릭터들을 보면 왠지 기특하고 뿌듯합니다. 필사적으로 싸워 온 것에 대한 보상이니까요. 독자가 서술자인 하루히로와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인칭 서술에 몰입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전개는 이 작품을 한층 매력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캐릭터들이 아직 안정적으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아니기 때문에 매 전투마다 위기에 처하는데 그 묘사가 훌륭해요. 단순히 몬스터를 잡고 아이템을 얻는 사냥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이 이어지니까요. 이런 비장함은 '낙인의 문장'이나 '천경의 알데라민' 같은 거시적인 전쟁물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파티 단위로 싸우는 작품에서 보게 되니 또 느낌이 새로웠습니다. 작품의 전투 묘사가 특출난 편은 아니지만 단문으로 이루어진 서술은 긴박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또 주인공의 초조와 당황 등의 감정이 잘 드러나 몰입하기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투 장면의 긴박감만으로도 읽는 재미가 충분한 소설이었습니다.

 캐릭터들의 매력은 조금 미묘합니다. 주인공 하루히로는 소극적인 성격으로 모든 일을 신중하게 결정하려 해요. 다만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도 소극적일 때가 많아 답답하게 느껴질 사람도 제법 있을 것 같습니다. 히로인들은 딱히 남자 캐릭터들과 연애 플래그가 서 있지도 않고 모에 요소도 갖고 있지 않아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작위적인 캐릭터성이 작품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대신,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지 못한 건 아쉬운 편이에요.

 무거운 판타지 계열 작품을 찾는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초반 서사가 좀 심심한 편이긴 하지만 권을 거듭할수록 전개가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무엇보다도 캐릭터의 활용 자체가 뛰어나요. 이야기의 완성도 자체도 높기 때문에 분위기만 취향에 맞는다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시리즈 평점: ★★★★

1권 평점: ★★☆
2권 평점: ★★★
3권 평점: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와 카메라와 그녀의 계절  (0) 2015.12.21
푸른 봄의 모든 것  (1) 2015.08.10
일념일로  (0) 2015.03.07
할시온 런치  (0) 2015.03.04
메멘토 모리  (0) 2015.03.04

WRITTEN BY
Kalvin.
덕질 기록중

,